동굴인 - 김용현저
오십 칠년 전에 나는 공주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하숙집을 나와 산 속 동굴에서 살았던 때가 있다.
새학기가 시작된 어느 봄날, 나는 혼자서 수원지가 있다는 금학동 뒷산을 올라갔다. 우연히 동굴을 발견하고 들어가서 보니, 그 규모가 두세 사람은 누울 수 있겠고 고개만 약간 숙이면 드나들 수 있는 하향식으로 4m쯤 되는 바위굴이었다. 굴 안에서는 축축하고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고, 마치 항아리 속에 고개를 처박았을 때처럼 내 숨소리가 아주 크게 들렸다. 순간 내가 살아있다는 존재감이 확 들어왔다
나는 즉시 등산을 중단하고 미나리깡 장터로 가서 왕굴 피로짠 돗자리 두 장과 호신용으로 식칼을, 그리고 낫과 호야, 한 되의 석유를 사들고 굴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잔솔과 긴 풀을 베어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돗자리를 덮었다. 남은 돗자리로 입구를 막고 식칼은 잠자리 밑에 감췄다.
나는 하숙집을 나와 오백여 미터 떨어진 마을에 밥집을 정했다. 그리고 학교 도서관에서 문학과 철학 관련책들을 빌려다가 밤늦도록 읽고 시를 지어보기도 했다. 가끔 도마뱀들이 무슨 책을 읽나 궁금했던지 혀를 날름대며 찾아올 때도 있었다. 달이 밝은 밤이면 밖에 나가 담배를 피워 물고, 산의 흐릿한 능선이며 골짜기의 검푸른 숲을 바라보다가 소주에 취하여 잠이 들기도 했다. 봄 밤엔 적막 속에서 가끔 휘파람새가 '삐익삐익' 길게 울었다. 나도 휘파람으로 화답했고, 차츰 다람쥐나 고라니 같은 산짐승과 풀벌레들을 짝사랑하게 되었다.
등교길에 진달래를 한아름 꺽어 교실 창문가에 꽂아놓으면 여학생들이 향기를 맡으며 즐거워했고 나를 동굴인으로 불렀다. 일요일이면 석초동인 윤석산과 이희일 이장희 친구들이 놀러와서 소주파티도 하고 미술반 허진돈 친구는 마분지에 용을그려 동굴벽에 붙이고 용굴이라 칭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장희 친구가 자기도 동굴에서 살고 싶다고 해, 우리는 서로를 깊이 이해하는 계기를 가졌다.
울긋불긋 아름답고 따뜻한 봄날은 가고 온산에 신록이 우거져 짙푸른 여름이 되었다. 아침이면 축축한 이부자리를 바위에 펼쳐놓고 등교하곤 했는데 어느 날은 돌아와 보니 소나기에 흠뻑 젖어 낭패를 보기도 했다. 장마가 지자 동굴 속은 벽에 물기가 비치고 장희는 몸에 붉은 반점이 돋아 가려워 했다. 급기야 더이상 못 견디겠다며 하산하고 말았다.
나는 여름밤 풀벌레 소리와 계곡의 물소리를 벗삼아 외롭고, 쓸쓸하고, 높고, 아름다운 동굴 생활에 익숙해져 헷세의 "지성과 사랑" 속 골드문트처럼 멋진 사랑을 꿈꾸며 젊고 푸른 낭만을 즐겼다. 가을이 되자 학교에서 내가 조직한 곰나루극회에 제1회 공주 부여 공동개최 백제문화제의 한 프로그램으로 사극 한 편을 공연해 달라며 10만원의 예산이 내려왔다.
단편소설가 영어과 최상규 교수가 '사극 의자왕' 희곡을, 국어과 한상각 교수가 연출을, 미술과 한 교수가 무대를, 가정과 이영애 교수가 의상을, 새로 오신 젊고 예쁜 조교수가 분장을 맡아주셨다.
나는 의자왕, 신필자는 임자라는 신라의 간자인 왕비, 정삼수는 계백, 이강노는 부음, 유수명은 상현, 송요창은 간신 좌평역을,,,, 시내 호서극장에서 낮과 밤 2회 공연을 무대에 올렸다.
"나를 밟고 일어서라, 백제의 백성들아!"
동글 밖 어둠을 향한 절규가 산울림으로 메아리쳤다.
저 풀꽃 한 송이
개인시집 (누군가 강을 건너고 있다) 중에서
출처 : 수지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