굼벵이의 수난 - 김용현저
아버지는 울안에 있는 뒷밭에서 쟁기질을 하시다가 나를 부르셨다. 바가지를 가지고 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작은 방 창문밑에 있던 쬐그만 박 바가지를 들고 뒤란 언덕베기에 있는 밭으로 올라갔다. 뒷밭은 해마다 삼을 심었었다. 올해도 삼씨를 뿌리기 위해 밭을 갈아엎고 계셨다. 붉은 빛 털을 가진 황소가 목덜미에 멍에를 걸고 쟁기를 끌고 있었다. 아버지는 쟁기를 잡고 따라가며 보습 날에 뒤집히는 흙덩이를 살피다가 허연 굼벵이가 보이면 발로 가리키시며 날더러 주워 담으라고 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뒤에서 밭이랑을 따라가며 땅속 보금자리에 있다가 천지가 개벽되는 바람에 갑자기 세상구경을 하게 된 굼벵이를 손으로 잡아 바가지에 넣었다. 잡는 순간 굼벵이는 죽은 듯이 몸을 동그랗게 움츠렸고 탱탱함과 차가움이 느껴졌다. 바가지 속에 들오가서는 붙잡혔음을 알고 달아나려고 서로 엉켜서 한 덩어리가 되었다.
어떤 놈은 온몸이 누렇고 유난히 컸는데 뒤쪽은 거무스레했다. 곧 하늘로 승천할 놈 같았다. 태어난 지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새끼들도 있었다. 굼벵이는 땅속에 살면서 식물의 뿌리를 갉아 먹는다. 칠년이나 그렇게 어둠속에서 살다가 땅밖으로 나와 나무나 풀줄기 위에서 허물을 벗고는 매미가 되어 하늘을 날아다닌다. 여름 한철 매미는 나무수액을 빨아먹고 살다가 알을 낳고는 그 짧은 일생을 마감하고 만다. 느림보 굼벵이의 일생을 일러 주시면서 농사를 해치니까 잡아 없에야 한다고 하셨다,
"이려이려 쩌쩌...워 워!" 황소가 숨이 차서 코를 씩씩거리며 마지막으로 밭 귀퉁이까지 갈아엎자 아버지는 멍에를 벗기고 쟁기를 옆으로 치우셨다. 촉촉하고 검은 빛이 나는 흙이 보습에 뒤집힌 모양 그대로 이랑마다 덩어리진 모습을 보며 황소가 엄청난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밭고랑을 만들어 삼씨를 뿌리면 내 키의 두 배난 되게 삼이 자라 숲을 이룰 것이다. 그러면 우리 형제들은 숨바꼭질을 할 때 또 삼밭 속으로 몸을 숨겨 술래를 따돌리고 말 것이다.
굼벵이는 얼 마리도 넘었다. 마당으로 내려와서 닭들을 불러 놓고 쏟아 주었다. 빨갛고 커다란 볏을 단 수탉이 굼벵이를 콕콕 찍으며 부리로 집었다 놓았다를 반복했다. '꼬꼬꼬...' 소리를 내니까 몰려든 암탉들이 저마다 한 마리씩 물고는 잰걸음으로 돌아서서 쪼아 먹었다. 입맛을 다시며 또 모여들었으나 굼벵이는 순식간에 없어져 버렸다. 암탉들을 불러 모아 특별 식을 나눠 먹인 수탉은 군침만 삼키며 홰를 한번 치고는 두엄이 쌓인 곳으로 무리를 이끌고 갔다. 마치 우리 집을 이끌어 가시는 아버지의 뒷모습 같았다.
소를 외양간에 매어놓은 아버지는 나에게 여물을 주라고 하셨다. 한 소쿠리 여물통애 쏟아놓자 허겁지겁 제대로 씹지도 않고 연신 목구멍 속으로 집어넣기에 바빴다. 일을 많이 해서 몹시 배가 고팠던 모양이었다. 지게를 받쳐놓고 쟁기를 내린 아버지는 아직도 맨발인 채로 평상에 걸터앉아 어머니가 차려놓은 술상의 막걸리를 한 대접 벌컥벌컥 들이키셨다. 몹시 목이 마르셨던 모양이었다.
새까만 흙덩이 속에서 허옇게 배를 드러내놓고 뒹굴던 느림보 굼벵이들이 다시는 삼밭에 오지 말고 대나무 숲이나 소나무 숲같이 넓고 큰 땅 속에서 살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어디선가 매미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등이 갈라지고 투명한 매미허물도 눈앞에 어른거렸다.
저 풀꽃 한 송이
개인시집 (누군가 강을 건너고 있다) 중에서
출처 : 수지나라
